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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자취생의 하루

스무 살 적의 이야기_사랑과 배려 1

by 휴 우 2021. 5. 11.

 

 

갓 스무 살, 대학 1학년생이 되어
설레는 마음으로 들었던 수업 중 김혜수 교수님의 '철학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이 있었다.
거의 모든 수업 시간에 조는 것이 백다예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과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만..ㅎㅎ
조는 와중에도 간간이 들려오는 와닿는 교수님의 말씀이나 교재 문장들이 꽤나 마음에 들었었던..ㅎㅎ

그러던 와중 교수님께서 '사랑과 배려'라는 주제로 레포트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주셨다.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던 풋풋한 시절,

말도 안될 정도의 컴맹으로 인터넷 검색조차 제대로 할 줄 몰랐던 내가 
별수없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 고심고심 적어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그 때까지만 해두 책이나 어떤 글귀를 읽으면 통째로 곧잘 외우는 편이라
생각나는대로 무작정 적고 봤던 것 같다.. 
그만큼 부족한 글이지만 귀엽기도 하고ㅎㅎ

폴더를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과제물을 보고
잠시 감상에 젖어보다가
지금의 나와는 또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게 된다. 

15년도 글이니까..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변했다. 
비슷한 과제가 있는 학생이라면 참고해도 좋을 것 (과연 좋을까?) 같다.

혹,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내리는
'사랑' 그리고 '배려'의 정의는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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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배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사랑과 배려가 메말라감’을 한탄하고 있다. 배려와 사랑은 왜 필요한 것인가. 그리고 이것들은 과연 좋은 것들인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에서 “우리는 순진무구함과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종류를 선택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를 가지고 있는 한 폭력은 숙명이다.” 라는 말이 나온다. 일단 태어난 이상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죽이거나 파괴해야 한다.
흔히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과 번뇌의 기원이 되는 이 사실을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신은 인간을 이기적인 동물로 만들었다. 이 통제되지 않은 이기심은 단순한 생존을 벗어나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서도 드러나 불필요한 상처와 슬픔을 야기한다.

인간은 자신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이 사실을 거부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한다고 믿는 생각과 실제 그 생각의 존재의 불일치가 야기된다. 이기적이라는 본능을 가졌지만 혼자 살기에는 나약한,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사회는 그 본성을 방치했다간 발생하고 말 다양한 부정적 변수에 대비하여 암묵적인 관습과 도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어, 이를 ‘교육’이라는 명목아래 서로에게 주입시켰다. 그럼으로써 이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인간은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이타적인 것이 더 좋은 것이며, 그런 이타적인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이다.’라는 사상이 심어지게 된다.

이 주입된 사상은 본성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인간의 이성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본래 ‘이기적’이기 때문에 자신이 남에게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추어 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내면에서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본성이 표출된 데에 대한 자괴감을 느끼며, 이를 직시하였을 때 견디기 힘든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여기서 이러한 인간 내면의 갈등을 해소시켜주는 가장 기본적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해결책 중 하나로 ‘배려’가 탄생한다. 남을 보살펴주고 걱정해주는 행동에 마음을 씀으로써 내면에 자리 잡은 이기적인 본능을 부정해보고 타인에게서 오는 좋은 시선, 교육받은 자신의 원칙이 잘 지켜졌다는 뿌듯함 등의 쾌감을 느낀다. 이 쾌감이 약간의 관심, 약간의 희생, 약간의 헌신 등이 소모되는 행위인 배려를 지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원동력은 사랑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인간은 사랑에 빠져 남에게 퍼부어줌에도 불구하고 황홀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자신이 이타적이고 선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싶어 한다. 즉 그 행위를 통해 자기만족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감정이 너무 익숙해지거나 소홀해질 때, 상대에게 베푼 호의가 상대방에게 머물 뿐 내게 돌아오는 양이 형편없다고 느낄 때 가식의 가면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하고, 외면하고 있던 서운함과 억울함이 그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 나와 가면은 깨져버린다. 가면 없이 맨 얼굴로, 발가벗겨지듯 드러난 이기적인 본능은 그 수치심과 함께 상대방에 대한 분노, 증오 같은 악감정으로 변질 되며 한계가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배려와 사랑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그럴까. 배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으로 그 근본정신이 된다고 평가되는 사랑에 대해 먼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사람은 처음 사랑이란 감정을 가질 때 황홀한 감정을 느낀다. 자꾸 생각나고 떠오르고 걱정되고 곁에 머물고 싶은 이유도 계속 이 감정을 느끼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모가 자식을 낳는 순간, 가족이라는 좁은 인간관계 틀을 벗어나 순수한 아이가 (자애롭지만 권위적인 부모와 다른) 서로 대등한 위치로 보이는 친구라는 인간관계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낯선 이성을 보며 뇌 변연계에서 페닐에틸아민(phenylethylamine)이 분비될 때 등 태어나 처음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느꼈던 황홀한 감정은 혼자 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가장 강력한 쾌락이 된다.
따라서 그 첫 순간을 한번 맛보면 혀를 떼어낸 순간부터 그리워하고 끝없이 갈망하게 된다.

이는 인간관계가 사람의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을 좌지우지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첫 경험에서 느낀 황홀함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말은 곧 그 경험이 지속되지 않았고, 그 의미가 퇴색되거나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발전시켰던 라캉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그리고 금지된 것만을 욕망한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끄집어내진 아이는 엄마의 품에 안기려하고, 젖을 뗀 아이는 눈에 보이는 것을 모두 빨고 씹으며 이것이 이성에게 키스를 하고 싶은 욕망으로까지 이어진다. 애인을 사랑해서 키스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젖꼭지에 대한 잃어버린 쾌락을 절망스럽게 회복하려고 움직이는 것이다.

 

 


얼마 전에 한 매체에서 ‘여자는 정말 밥 배, 간식 배가 따로 있을까?’라는 주제로 집행된 한 인체 실험이 화제가 되어, SBS에서 비슷하게 ‘술 배, 물 배가 따로 있을까?’라는 주제로 실험을 진행했다. 남자실험자들의 위는 술 역시 여자들의 디저트처럼 받아들이기 위해 위는 운동을 해서 자리를 늘렸다. 그러나 술을 많이 마신 후, 물을 봤을 때의 우리 몸의 반응은 달랐다. 전문가들은 물은 필요에 의해 섭취되고 술은 기호에 의해 섭취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생리적으로 꼭 필요해서 생기는 욕구는 조건만 충족되면 비교적 덜 갈망하며 자제가 가능하지만, 굳이 필요하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이기에 생기는 욕구는 아무리 채워도 모자라다고 느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감정은 ‘디저트’, ‘술’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에 해당하는 나머지 감정들(기쁨, 슬픔, 분노, 당황, 공포 등)과 같이 상황에 따라 즉각적이고 단순하고 당연하게 발휘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약간의 사치성이 있는 감정이다.
‘물’에 해당하는 감정들은 생리적 욕구의 충족여부 같은 1차적인 상황에서 발생 가능하지만 사랑은 마음의 여유가 조금이라도 있을 때나 가능한 기호성 감정이다. 종족번식을 위한 필수적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인간의 몸은 신체가 치명적이 상황에 있을 때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데 치중하여 종족번식과 관련된 기능을 먼저 멈춘다.
생존의 욕구가 어느 정도 만족된 뒤에 나타나는 불멸의 욕구가 드러난 것이 종족번식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을 나머지 감정들과 같은 차원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필수적인 본능은 단순하지만 이 ‘기호적인’ 욕구는 약간의 사치성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조금 복잡하다.

굳이 이해를 돕는 비유를 하자면 당장 먹고살기 바쁜 계층의 아이들이 받는 가정, 학교에서의 교육과 상위계층이 받는 교육을 비교해보면 상위계층은 굳이 그들만의 복잡한 격식과 교양을 더 갖춰가며 이 부분에서 다른 부류들과 분리되고 차별화된 자신들의 모습에서 만족을 느낀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순한 감정들과 엮여 취급하여, 사랑의 빠진 이들에게 그 생각을 드러낸다면, 그들에겐 정말 무례한 행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처음 ‘사랑’이란 감정을 가질 때 사람은 단순히 ‘사랑한다.’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두려움’을 느낀다.

처음 이성에게 확실히 반한 것인지 아닌지 헷갈려하거나 섣불리 누구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에 대해 갈등을 느끼게 된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는 술의 맛을 알아버리면 감정이라는 위는 무리해서라도 운동을 하고 자신이 찢어지더라도 수요할 수 있는 공간을 늘리려 할 것이며 이는 곧 헌신과 희생의 준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아무나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생긴다.
‘자신이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함으로써까지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비울 가치가 있는가, 그 사람이 그만큼의 쾌락을 나에게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합리적인’ 감정들이 끊임없이 갈등하고 타협하여 ‘사랑에 대한 확신’을 결정한다.

그 공간에 타인이 들어온다는 것은 그 타인의 감정에 내가 동요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느끼는 슬픔, 기쁨, 분노에 내가 느끼고 싶은 감정과 혼합되어 나타남으로써 본인에게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
두 배의 쾌락이거나 견디지 못 할 만큼의 고통이다.
이러한 도박성은 더 사랑을 갈망하게 하고 더 사랑에 집착하게 만든다.

============>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