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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자취생의 하루

스무 살 적의 이야기_사랑과 배려 2

by 휴 우 2021. 5. 11.

 

 

 


 이는 서로 간에 ‘사랑’이라고 인식되는 이 감정을 주고받을 때뿐만이 아니라, 내가 일방적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다고 확신이 설 때부터 나타나는데 여기서 사랑은 자기만족의 측면이 강하게 반영되어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감정은 상대방이 언젠가 본인을 좋아해줄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을 때 지속가능하다.

즉, 아직은 가질 수 없지만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있어야만 ‘자기만족’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상대가 완전히 자신에게 관심이 없고 이뤄질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드는 순간, 금지된 것에 대한 욕망으로 사랑은 더 크게 불타오르다가 ‘나에게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 돌아올 수 있는 것이 없게 될 것 이라는 점을 정확히 감정 깊숙이 인지하는 순간 그 사랑은 서서히 식거나, 변질되어 미움과 증오로 바뀔 수 있다.

 타인에게서 느끼는 이 ‘사랑’이라는 쾌락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지속적으로 추구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를 위한 가장 좋은 도구가 ‘배려’이다. 배려의 사전적 의미는 도와주거나 보살펴 주려고 마음을 쓰는 것, 여러모로 마음을 자상하게 쓰는 것이다. 상대를 위한 일종의 작은 관심과 헌신과 실천이 요구된다.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바로 서(恕)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위의 공자와 제자의 대화는 배려의 근간을 이루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은
‘그러니 너도 네가 바라지 않는 일을 나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이어진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의 양보를 해주었으니 너도 나에게 언제가 비슷한 양보로써 보답해야한다는 말이다. 너무 매정하고 각박하게만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냐고 반박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상대에게 배려를 해주었는데 상대는 나에게 비 매너적인 태도로 보답했을 때 그 상황을 기꺼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배려'라는 행동은,
당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행위이다.
배려를 받는 사람은 자신이 조금 더 소중해지고 특별해짐을 느낀다. 이 배려를 싫어할 인간은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은 모든 인간이 이미 알고 있다. 따라서 배려는 순수한 이타심에서 나온 게 아니라 타인에게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타인의 관심을 받으려는 목적에서 나온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란 쉽지 않다.
타자란 나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계를 지속해 나가는 과정에서 정서적, 물질적으로 상호교환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때 우리가 긍정적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넘기는 것들을 물질적이던, 정서적이던 간에 선물의 개념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그래야 타인은 결론적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배려’의 의미를 느낀다.
하지만 본능은 뇌물의 개념으로 체화시킨다.

선물과 뇌물에 관련된 철학자 자크데리다의 말을 먼저 살펴본다.

"선물이 주어지는 조건으로서의 이런 ‘망각’은 선물을 주는 쪽에서만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을 받는 쪽에서도 근본적인 것이다. 특히 선물을 주는 주체에게 선물은 되갚아지거나 혹은 기억에 남겨지거나, 아니면 희생의 기호, 다시 말해 상징적인 것 일반으로 남아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상징은 즉시 우리를 또 다른 상환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사실 선물은 주는 쪽에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측면 모두에서 선물로 드러나지도, 선물로 의미되지도 않아야만 한다."
-「주어진 시간」

선물이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주고받는 것이고 뇌물은 대가를 전제로 하고 주고받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선물을 주면 나는 그와 액면가가 비슷한 선물을 고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본인이 준 것보다 더 좋은 선물을 받는다면 미안해하면서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는 비싸거나 좋은 걸 주었는데 친구는 터무니없이 저렴한 걸 줄 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가? 여기서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대가를 바랬던 욕망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애초에 상대방이 나에게 얼마만큼을 주었느냐를 따지는 것부터 선물의 개념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 선물과 뇌물의 교환에서 작용하는 인간의 심리를 배려의 개념으로 치환했을 때, 여기서 안정적인 쾌락유지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타인이 먼저 나에게 요구한 것도 아닌데 내가 먼저 ‘배려’라 생각하고 베푼 뒤, 타인에게서 돌아온 대가가 성에 차지 않을 경우 본성은 꿈틀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인간은 이기적이지만 약하다.
따라서 사회를 형성하는데 본성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를 막기 위해 이타심을 강조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교육을 통해 내면화된 이 ‘이타심’은 실로 본성과 충돌하기 때문에 사고와 존재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사랑과 배려는 이기적인 본능에 뿌리를 둔, 가시적으로는 이타심과 헌신이 피워내는 아름다운 장미이다. 그래서 그 내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본능과 욕구, 이익을 위한 가시로 치장한 가식일 수 있다.

사랑은 처음 경험에서 느낀 황홀함에서 출발하였으며 끊어진 그 경험에 대한 절박한 욕구로 인해 발휘되고, 그 욕구를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으로 ‘배려’가 출현한다. 이 배려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일시적으로 가려줌으로써, 인간이 생각과 존재가 일치한다고 느끼게 해주고 여기서 쾌락을 맛보게 해준다.

 사랑과 배려는 이기적인 인간이 ‘희생하고 헌신하고 관심을 갖는’ 노력을 해야 하는 귀찮은 존재일 수 있으나 그 존재가 인간에게 주는 쾌락은 상당히 도박 적이고 짜릿하기 때문에 인간은 계속해서 이것들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위험부담을 감수한 만큼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쾌락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 인간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며 대상에 대한 인식은 반전된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죽어줄 수도 있다고 한다. 과연, 정말 이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사랑’을 맛보면서 느끼는 황홀함에 취해, 그 도박성에 취해 이성에서 조금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이성에서 어긋남’, 이 ‘황홀함’에 취해 어느 정도 자신을 망각하게 되는 양상들은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아주 소중한 형각이 아닐까. 그래서 갈수록 복잡해지고 합리적이고 개인적으로 운영되는 이 사회에서 배려와 사랑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